명예기자 권오성
남부순환도로 옆 식당을 나서다 도심 속 숨겨진 마을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마을 이름은 갈현(葛現:칡이 많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울산 남구 신두왕로 327)마을로 20년 거주하신 서정호 아주머니께 들을 수 있었다. 예전에는 50가구가 거주했는데 현재는 15가구 정도 거주하며, 대부분이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다고 했다. 마을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시민들이나 학생들이 많이 찾을 수 있는 친환경 마을로 지정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령화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가 기억하고 알아야 할 삶의 터전의 역사적 사실이 자꾸만 잊혀져 가고 있다.
기자가 20여년을 살아 온 지번 신정2동 1647번지는 푸른마을이다. 얼마 전까지 택시를 타고 푸른마을이라고 하면 알았는데 지금은 모른다.
남구에는 삼호동, 무거동, 헐수정 마을 유래 이야기를 담은 상징조형물이 있다. 옛지명 복원을 통해 우리 고장의 역사적 유래를 알려 주민들의 애향심을 고취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남구 삼호동, 무거동, 헐수정 부락은 인근 범서읍 굴화와 함께 신라 천 년의 흥망성쇠를 나타내는 유서 깊은 곳이다.
굴화(屈火)는 신라 5대 파사왕(破娑王)때에 최초로 현치(縣置)를 둠으로써 신라의 번성을 이끈 곳이다. 삼호(三湖)·무거(無去)·헐수정은 신라의 패망을 암시한 전설을 간직한 지명이기도하다.
세 곳(삼호·무거·헐수정)에 얽힌 전설은 참으로 흥미롭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은 망해가는 신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문수보살을 모셔 국가적인 재를 올리길 원했다. 각지로 신하들을 보내 훌륭한 스님을 모셔오도록 하였으나 아무도 찾지 못했다.
그 중 한 신하가 울산 문수산 아래 작은 절에서 스님 한 분을 찾았는데 형색이 너무 초라해 모셔오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도 다른 스님을 찾지 못하자 부득이 그 스님을 모셔서 제를 올렸다. 그렇게 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스님에 왕이 “스님 제발 나라의 재를 주관했다는 말을 다른 데 가서 하지 말아주세요.”라고 부탁하자 스님도 “예 그러지요. 그 대신 임금님도 문수보살을 모셔다 재를 올렸다는 말을 아무한테도 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는 가버렸다.
그제야 그 스님이 문수보살의 화신(化身)임을 깨달은 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말을 달려 뒤따라 태화강을 건너자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음을 알고 “문수보살님”하고 세 번을 불렀다 하여 석삼(三)과 부를 호(呼)자를 써서 삼호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이때 한 동자승이 나타나 길을 안내하므로 따라서 지금의 울산대학교 운동장쯤에 이르러보니 동자승조차 간(去)곳이 없어져서 무(無), 그 사라진 쪽(지금의 울산대학교 정무 주변)을 무거라고 불렀으며, 경순왕이 “헐(할) 수 없구나 나라를 붙잡을 수가 없구나.” 탄식하며 머문 곳이 헐수정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이야기 조형물은 삼호마을(삼호교 옆), 무거마을(별빛공원), 헐수정마을(헐수정공원)에 각각 설치되어 있다.
동 마다 주민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를 알고 살아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