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 명예기자 윤경숙
10월3일, ‘다 같이 돌자. 개운포성지 한 바퀴’ 답사가 있어 개운포성지를 찾았다.
이날 김진곤울산향토사도서관관장의 해설을 듣기 위해 개운포성지에 20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20명의 참석자 중에는 성암동이 고향인 사람들, 향토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글을 쓰기 위해 온 사람들, 화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김관장은 개운포성지를 돌기 전에 성암동과 개운포성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성암동은 김관장이 태어난 고향이기도 해 개운포성지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김관장에 의하면 1980년 초까지만 해도 성암동에는 120여 가구가 살았던 아름다운 마을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울산 공단의 환경오염지구 이주사업의 일환으로 성암동 마을 전체가 철거되면서 다운동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개운포성지는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으며, 해변과 계곡을 이용해 돌로 성벽을 쌓은 성이다.
성암동은 신라 때부터 왜구 방어의 요충지였으며, 조선 초기 이곳에 개운포수군만호진이 설치되었던 곳이었고,
세조 5년(1459) 정월에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을 동래에서 옮겨와 중종 39년(1544) 때까지 80여 년 동안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곳에 개운포영성이 있었기 때문에 성내(城內), 또는 성암(城岩)이라고 한다.
그 후 효종 7년(1656) 때 여천동의 도산에 있었던 선소(船所)를 이곳으로 옮겨와 고종 32년(1895) 수군만호진의 혁파 때까지 존속하였다.
그래서 성암동을 ‘선수마을’이라고 부르는 것도 선소가 있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간단하게 해설을 듣고는 먼저 동문 터가 있는 곳으로 이동을 했다.
동문 터로 오르는 길은 약간 비탈져 있어 길게 한 줄로 서서 올라갔다.
10여 분 올라가 개운포성에 있었던 두 정자, 체오정과 제승정 그리고 객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둘러 보았다.
두 정자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짐작과 추측만 한 채 발길을 돌렸다.
동북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치성(稚城:적의 접근을 빠르게 관측하고 성벽에 접근한 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쌓은 구조물)이 있어 눈여겨 보았다.
현재 개운포성지에는 치성이 3곳이 남아 있고, 눈으로 확인이 가능했다.
그 밖에도 해자(垓子:성벽 주변에 호(壕)를 파거나 둔덕을 만들어 적을 막기 위한 시설물)를 보고, 두 시간만에 답사는 마무리 되었다.
지금의 개운포성지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곳,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곳, 점점 사라져 가는 울산의 역사와 유적지를 이대로 두고 볼 것인가?에 대해 한번쯤 되새겨 볼 문제로 남았다.
이날 김관장은 답사를 마무리하면서 이곡(李穀)의 한시를 읊었다.
경치 뛰어난 땅에 신선들 빽빽이 놀았고, 구름이 개이고 세상길이 통했네.
어렴풋이 보이는 신라 때의 두 신선 일찍이 보았던 그림 속의 모습이네.
달빛속에 추는 춤은 흰 옷자락이 너울거리고 머리에 꽃은 흐드리게 붉은 빛이네.
남은 흔적 찾으려 해도 끝없이 어둡고 바람에 반쯤 부푼 돛단배를 불러 기다리네.
참석자들은 추석 연휴임에도 시간을 할애해주신 김진곤울산향토사도서관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