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의 얼굴을 걸어두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벽사진경의 노래 처용가를 지은 처용이 처음 나타난 처용암을 가보다
처용암은 울산시 남구 황성동 세죽마을 바로 앞에 보이는 바위섬입니다. 이 바위에서 처음 처용이 나타났기 때문에 처용암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삼국유사에 기록된 처용랑설화와 관계있는 유서 깊은 바위섬입니다.
신라 제49대 현강왕(875~886년)이 이곳에 와서 순유 하다가 돌아가던 중 물가에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짙게 끼어 길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일관이 동해의 용이 조화를 부리는 것이니 좋은 일을 해주어 풀어야 한다고 합니다.
임금이 명령을 내려 근처에 용을 위한 절을 세우라고 하자 구름과 안개가 걷힙니다. 이후 이곳 이름이 구름이 걷힌 포구라해서 개운포라 불리게 되었답니다.
동해 용왕이 크게 기뻐하며 왕자 일곱을 거느리고 나와서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으며,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임금을 따라 신라의 서울인 경주로 갔는데 그가 처용입니다.
임금은 처용에게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하고 급간이라는 벼슬을 내립니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 11년째를 맞이하는 처용가는 신라 현강왕때 아내를 범하는 역신을 물리치기 위해 처용이 지었다는 8구체 향가입니다.
여기서 역신은 전염병을 퍼뜨리는 천연두로서 아내가 병이 걸렸음을 의미합니다. 역신이 아내를 범하지만 처용은 화를 내거나 달아나지 않고 마당에서 춤을 추며 처용가를 부릅니다.
처용가는 벽사진경(사귀를 쫓고 경사로운 일을 맞이함)의 민속에서 형성된 무가이며, 신라에서는 벽사진경을 위해 처용의 가면이나 이름을 대문에 걸어두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는 처용가가 주술적 무가임을 알 수 있는데요 아내가 병이 들자 노래와 춤으로 역신을 물리쳐 아내의 병을 낫게 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서울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도다
둘은 나의 것이었고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마는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처용이 밤늦게까지 놀다가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역신과 바람을 피우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런데 처용은 비난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슬픔과 체념의 노래를 부르는데 마치 모든 것을 초월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보통사람으로서는 하기가 힘든 행동인데, 이러한 처용의 모습에 역신도 감복을 하게 됩니다.
역신이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고 처용앞에 꿇어앉아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범하였는데도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지금 이후부터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역신이 찾아온다는 것은 병에 걸리는 것을 말하는데 처용의 얼굴을 걸어두면 그 집에 가지 않겠다고 하니 이는 병이 생기지 않음을 의미하죠. 이후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사기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움을 맞아들였다고 합니다.
울산 남구 처용암에 가면 처용 포토존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처용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면 어떠한 병도 감히 우리를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처용설화가 간직되어 있는 이곳에서 소중한 사람과 함께 추억을 남겨보시는건 어떨까요.